요한계시록 2장) 두아디라 교회 칭찬(왈덴스,위클리프,얀후스&제롬)
▼ 두아디라 교회: 역사와 배경 ▼ Review
요한계시록 2장) 두아디라 교회: 역사와 배경
1. 시대적 배경 일곱교회 가운데서 가장 작은 교회이면서 제일 긴 편지를 받고있는 두아디라는 사도행전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염색업을 비롯해서(행 16:14) 주석 제련 등 각종 제조업이 발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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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칭찬과 권면

(1) 암흑을 밝히는 사랑의 수고
: 두아디라 사람들은 그 도시의 산업적인 성격 때문에 다른 도시에 사는 사람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인내하며 섬겨야 했다. 사랑이 없으면 수고할 수가 없고 소망이 없으면 인내할 수가 없다. 또한 진정한 믿음이 있어야 역경 중에서라도 꿋꿋이 섬길 수가 있는 것이다. 두아디라 시대는 중세의 짙은 암혹시대였지만 그 어두움만큼이나 빛도 분명 했다. 교회가 세속적인 권력에 집착하여 오만해지고 형식주의에 빠져 냉랭하며 세속에 짙게 물들어 악취가 심하게 날 때에 진흙탕 속에서 연꽃처럼 피어나 사랑과 청빈과 봉사와 복음전파의 기치를 높이 든 이들이있었다.
A. 왈덴스인

1170년 프랑스의 리용(Lyons)에 살던 상인 왈도(Peter Waldo)에 의해 난 평신도 개혁운동이다. 성경 말씀에 크게 감명받은 왈도는 자신의 재산을 바쳐 라틴어 성경을 그 지방어로 번역하고 필사하여 배포하면서 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리용의 가난한자들 (the Poor Men of Lyons)” 이라고 부르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 게 나눠주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오직 복음전도에만 헌신했다(참조, 마 19:21). 그들의 주장은 이러했다.


하지만 로마교회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고 프로방스 서는 1545년 22개 마을이 불태움을 당하고 학살된 사람은 4,000명이나 되었다. 1685년에는 이탈리아의 피드몬트에서도 박해가 일어나서 14,000여명이 포로가되었다.
B. 위클리프

: 대부분의 사람은 종교개혁의 시작을 마틴루터가 95개 논제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 정문에 써 붙이던 1517년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하루 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루터 이전에 이미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종교개혁을 한 준비작업을 해 오셨다. 바야흐로 종교개혁의 새벽이 동터오고 있었는데, 그 종교개혁의 샛별이 바로 위클리프이다. 위클리프는 14세기 유럽 최고의 명문인 옥스포드 대학교의 가장 유능한 학자로 왈덴스인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개혁을 이끈 인물이다. 국왕 에드워드 3세의 궁중 사제가 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도 있었던 그는 왈덴스인들의 주장을 반복했다.

이토록 철저한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교황청에 정면으로 도전한 위클리프는 누차 이단으로 정죄되어 처단이 요구되었으나 하나님의 섭리로 영국 왕실에 의해 보호를 받아 무사할 수 있었다. 위클리프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옥스퍼드 학자들을 모아서 1382년 최초로 라틴어 성경(the Vulgate)을 영어로 번역하여 백성들의 눈과 귀를 열어 줌으로써 종교개혁의 문을 노크한 것이다. 또한 왈덴스인들과 이 경건하고 헌신적인 평신도들을 택하여 예수님의 칠십인의 제자들처럼 전국을 순회하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설교하면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음으로 당시 의 민중이 얼마나 진리의 말씀에 주려 있었는가를 보여 주었다.
C. 얀 후스(Jan Hus)와 제롬(Jerome)

위클리프의 저서로 영향을 받고 일어난 사람이 보헤미아(Bohemia) 출신의 프라하 대학 총장 얀 후스였다. 개혁의 주도자였으며 보헤미아 민족의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특별히 후스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그림을 통해 전달했는데, 예를 들면 교황은 오만하게 마차를 타고 들어오는 반면 그리스도는 맨발로 걸어오는 모습이라든지, 사람들이 교황을 경외하여 그의 발에 키스하는 장면과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모습을 대조해서 그리기도 했다. 이 그림들은 설교 이상으로 엄청난 메시지를 전달했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개혁을 이어갔고 특히 성찬 예식에서 평신도들도 포도즙을 마실 권리가 있다고 강력히 요구했다. 로마교회는 포도즙 은 사제들만 마시는 것으로 제한했는데, 그 이유는 ‘‘조심성 없는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피'를 조금이라도 흘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면죄부에 대한 후스의 공격으로 그는 마침내 이단으로 정죄되어 도미니칸 수도원 안에 있는 토굴 감옥에서 7개월 동안 주림과 온갖 고문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이후 황제와 제후들, 추기경과 사제들이 지켜보는 대회의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마지막 요구를 받자 이렇게 대답했다.


이 말을 남기고 화형을 당하게 된다. 화형당한 후스는 위클리프처럼 유해가 강에 부려졌다. 교황청은 후스가 전한 진리를 근절시킨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날 강에 뿌려진 재가 대해로 흘러가서 각 나라에 씨를 뿌리고 온 세상에 진리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질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후스의 개혁의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각 시대를 통해 울려 퍼지고 있다. 그의 충성스러운 모본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문과 사형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곧이어 후스의 동료이며 프라하 대학의 교수였던 제롬도 붙잡혀가 심문을 받은 뒤 일년 가까이 가장 불결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주림과 병고에 지칠 대로 지쳐 마음이 약해진 그는 위클리프와 후스의 가르침을 취소한다는 사인을 하고 석방되었다. 하지만 양심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이를 번복한 후 1416년 5월 30일 화형을 당하게 된다. 제롬은 화형을 당할 때 변절의 사인을 했던 자신의 손가락을 먼저 태워 달라고 요청하여 , 손가락을 태운 뒤에 장렬하게 순교했다.

후스는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후스의 추종자들인 모라비안 형제들은 훗날 세계 경건운동과 선교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우리는 어떤가? 오늘날 교회는 어떤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 를 쉽게 저버리고 조그만 어려움과 불편함에도 진리를 타협하는 그리 스도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지 않은가! 조금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징징거리며 어떻게든 관철시키려고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말의 저주를 늘어놓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진리가 무너지고 외면당하는 시대에, 후스가 그랬던 것처럼 비록 순교를 당할지라도 진리를 수호하는 사명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라는 의무가 우리에게 지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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